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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본다는 충격에 짜증을 달고 살다가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시간:2010-12-5 17:23:32  작성자:패션   출처:백과  查看:  评论:0
内容摘要:[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짜증과도 잘 지내기까지【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앞을 못 본다는 충격에 짜증을 달고 살다가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짜증과도 잘 지내기까지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설가 김영하는 작가 지망생에게 가능한 한 짜증이란 단어를 삼가는 걸 권했다고 한다. 작가라면 상황과 인물에게 알맞은 섬세하고 적절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짜증은 사람의 거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아우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기는 하다. 서운해도 짜증이고, 황당해도 짜증이고, 화가 나도 짜증이고, 언짢아도 짜증이고, 무시당해도 짜증 난다. 일상에서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렇게 짜증이란 단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괜찮은 걸까?
 
서운한 것과 무시당하는 것은 분명 다른 감정이다. 내 생일을 깜빡한 아내에게 서운한 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동정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걸 무시당했다고 투덜댄다면 그냥 자기가 쪼잔한 거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두 감정을 짜증이란 한 단어로 표현하면 듣는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나는 측은해서 위로받을 사람도 되겠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속 좁은 찌질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를 온통 짓눌렀던 짜증
 
한때 나를 온통 짓눌렀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짜증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 짜증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짜증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그건 그 누구와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을 섞기 싫단 소리니까. 그 짜증은 없애고 싶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없애려 하기보다는 함께 잘 지내야 하는 것이고, 끝까지 노력해서 잘 다독여야 하는 것이다.
 
미리 염려하고 각오한 것이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은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 달, 아니 일 년이 지나도 마음은 더욱더 문을 닫아걸었고, 억울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화가 나는 것인지 모를 짜증은 매일 매일 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도 조금은 보인단 말이지. 다행이네. 하나도 못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어, 넌 그나마 다행이구나."

비교하면서 비아냥대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내가 못 보는데, 그래서 이렇게 힘든데 다행이라니, 어떻게 이런 소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이렇게 걸을 수 있으니까 좋네. 넌 걷는 걸 좋아하잖아."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못 보면서도 걸을 수 있으면 좋다는 건가?

"이건 안 해도 돼. 넌 할 수 없는 거야. 그냥 가만있어도 돼."

무시당했다고 짜증을 냈다. 아무것도 못 하는 불구자니까 그냥 가만있으란 소리 같았다. 보지 못해서, 내가 했던 걸 못 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사라지고, 즐기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나를 다독여 주는 빛
 
▲ 으스스한 겨울 풍경 빛의 부재, 더해지는 으스스한 기운과 잿빛 시야, 그 ‘짜증’이 꿈틀댄다.
ⓒ 김미래/달리

이런 신체적 장애로 인한 심리적 압박에 더해서 내 짜증의 저력을 배가한 것이 맑고 깨끗한 햇빛의 부재였다. 아예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온다면 모를까, 어두컴컴 흐린 날씨는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으스스한 겨울의 흐린 아침은 유난히도 그랬다. 투명하고도 깨끗하게 칠해진 하얀색 눈 앞이 온통 시커멓게 덧칠된 잿빛으로 변한 탓인지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 힘이 안 났다. 그래서 뭐든 하기 싫었다. 일도 하기 싫었고,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누구든 만나기도 싫었고, 심지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내게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들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길을 걷고, 산과 들과 바다를 찾으면서 적당히 이 짜증을 다독이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거기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맑고 깨끗한 햇빛,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그 청아한 햇빛이 눈뿐 아니라 내 마음마저 비춰줬다. 그랬다. 햇빛이라는 물리적인 빛이 마치 어둠을 몰아가듯 내 마음속에서 짜증이란 놈을 몰아내 주었다. 

으스스한 흐린 겨울 아침, 나는 그 짜증을 다독일 수 있도록 날 돕고 있는 또 하나의 빛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내가 만들어 가는 나만의 빛, 내 마음의 빛이었다.
 
며칠 전 늦잠을 잤다. 스마트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다. 급한 일도 없는데 괜히 기분이 언짢았다.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오는데 온통 깜깜했다. 오전 8시라면 환히 밝아 있어야 할 안방 창이 구별되지 않았다. 실내 조명이 켜져 있는지 구별하지 못하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커다란 안방 창 전체를 빛내는 햇빛만은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날이 흐리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둘러 화장실로 향하는데 아내가 밥을 먹으란다. 심술이 났다. 며칠 전부터 회사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어 놓더니 이젠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는 건가? 그리고 씻으러 가는 걸 뻔히 보면서 왜 밥을 먹으라고 할까? 나도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그대로 화장실로 가서 모른 채 씻었다.

씻고 나오니 아내와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얄미웠다. 그걸 못 기다려서 자기들끼리 먼저 먹는단 말인가. 터벅터벅 다가가 더듬더듬 의자를 찾아 앉으니, 아내가 먹기 편하게 반찬을 따로 덜어 놓았단다. 이번엔 그게 왠지 무시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거칠게 숟가락을 집어 드는데,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아, 이런 또 그 짜증이 나왔구나. 이놈의 자식이 또 그냥 아무 때나 비집고 나오려 하는구나.'

눈을 들어 부엌 창 쪽을 바라봤다. 역시 깜깜했다. 분명 아침 빛이 있을 테지만 내 눈에는 그냥 깜깜할 뿐이었다. 물리적인 빛이 사라진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짜증이란 놈이 설쳐대려는 게 분명했다.

시를 외우다
  
▲ 시 외우기 가슴 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시구는 한 줄기 두 줄기 번져가는 빛이 됐다.
ⓒ 김미래/달리

 

문득 김경미 시인의 시 '식사법'이 떠올랐다. 먹어야 사는 우리이기에 식사법은 어쩌면 우리의 사는 법일 수도 있다. 시인은 이렇게 시를 시작한다.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 그래야 한다면서 설탕 같은 달콤한 맛이 없더라도 끝까지 묵묵히 먹는 인내를 가지고, 인생의 고통은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고 성실 그 하나로 밀고 나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생이 규칙적인 좌절을 주더라도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 먹듯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고도 했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부엌 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리적 빛에 더해 내가 외운 시가 보태준 심리적 빛이 내 머릿속에 부엌 창을 그려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시를 외우게 된 것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친구의 뇌세포를 살려보자는 시도였다. 간단한 시라도 함께 외우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는데, 안타깝게도 내 노력도 부족하고 주변 사람들 반응도 모자라서 중단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시집 하나 제대로 읽지 않던 내가 무려 10편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신기했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 반복해서 중얼중얼 외우다 보니 오히려 내가 점점 나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시에는 숨은 빛이 있었다. 꼭꼭 시인이 숨겨둔 빛도 있지만, 독자가 읽고 또 읽으면서 발견하는 다른 빛도 있었다. 그래서 명확하지도 않고, 뚱딴지같은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게 시의 매력인 것 같았다. 그동안은 이런 이유로 시를 멀리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같은 이유로 내가 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를 더 외웠다. 여전히 좋았다. 아는 시가 없어서 교과서 시를 찾고 친구들에게도 추천을 부탁했다. 왠지 내 뇌가 향상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언했다. 뇌세포 살리기 프로젝트, 시 100편 외우기! 일주일에 서너 편을 꾸준히 외웠다. 까먹고 또 까먹어서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매일 매일 중얼거렸다. 화장실에서도 중얼거리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중얼거리고, 멍하니 앉아서도 중얼거리고, 문득 잠이 깨어 이불을 끌어당기면서도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시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빛을 전해줬다. 물리적인 빛이 내 시야를 환하게 밝혀줬다면, 시를 외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심리적 빛은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줬다.
 
밥을 다 먹을 때쯤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짜증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괜스레 웃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을 아내와 얼굴 마주 보고 외우기가 쑥스러워서 아내와 몇몇 친한 친구들이 들어있는 카톡 방에 나태주 시인의 시 '선물'을 외워서 올렸다.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
 
살짝 닭살도 돋았지만, 어찌 보면 그 시를 읽는 모두가 당신 아닌가. 기분이 상쾌했다.
 
이훤 시인의 시 '군집'에서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외면해 제대로 잉태되지 못한 감정이 '우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우울이 내밀하게 일으키는 데모도 이따금 정당한 것이라고 했다. 

내 생각엔 우울의 전 단계인 짜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 짜증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 곪고 곪아서 터져 나오는 내면의 은밀한 데모일지 모른다. 

신이 아닌 한 우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고 안아줄 수 없다. 감정이 곪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다. 아무리 숨어있다고 해도 그건 반드시 치료해야 할 상처다. 그런데 짜증이 그걸 곪아서 터지게 만든다.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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