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스팟

[2월19일!] "세상에서 중국을 외치다"… 최고권력자의 죽음

시간:2010-12-5 17:23:32  작성자:종합   출처:종합  查看:  评论:0
内容摘要:[역사 속 오늘] 덩샤오핑 사망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 중국 전 주석이 사망했다. 사진은 2021년 6월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식. /사진=로

[2월19일!]

[역사 속 오늘] 덩샤오핑 사망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 중국 전 주석이 사망했다. 사진은 2021년 6월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식. /사진=로이터
1997년 2월19일. 20세기 혼돈의 중국을 온몸으로 살아낸 덩샤오핑 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향년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개국공신으로 시작해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한 덩샤오핑은 일선에서 물러난 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덩샤오핑은 근대화와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중국 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빈곤에 허덕이는 중국을 구한 덩샤오핑. 오늘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꿈꾸는 중국몽은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1989년 6월4일 천안문광장을 피로 물들인 책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유학생에서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가로


관람객들이 2019년 9월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건국 70주년 중국 업적 전시회를 구경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1904년 8월22일 청나라 쓰촨성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열여섯살 때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프랑스 파리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던 덩샤오핑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해 1926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시기 덩샤오핑은 모스크바 중산대학교를 다니며 공산당에 입당하고 1927년 귀국해 중국공산당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모스크바로 끝난 그의 유학길은 훗날 중국식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덩샤오핑 정치 이론의 기틀이 됐다.

1927년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같은해 8월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한 덩샤오핑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중국의 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이다. 덩샤오핑은 이후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을 이끌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에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은 덩샤오핑은 1952년 정무원 부총리를 시작으로 1956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중국과 덩샤오핑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노동력 집중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기근으로 약 4000만명이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이 실패를 책임지기 위해 당시 총서기였던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그렇게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경제부흥운동을 일으켜 빈곤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권력의 위협을 느낀 마오쩌둥은 이념을 앞세워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극좌 사회주의운동인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이어지면서 중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문화대혁명 이후인 1978년 중국의 국민소득은 1인당 연간 100달러 수준이었으며 400만명 이상이 식량 부족으로 사망했다.

이 시기 중국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학생이 중심이 된 홍위병을 앞세워 극단적 테러 행위가 벌어지는 등 사회 붕괴 직전 상태에 이르렀다. 덩샤오핑 역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로 여겨져 중앙위원회에서 실각하고 홍위병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고문에 못 이겨 투신해 하반신 장애를 얻었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문화대혁명이 완전히 막을 내리면서 덩샤오핑도 복권됐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으며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올라섰다.



중국의 문 열다… 개혁개방으로 이끈 부국강병 '흑묘백묘론'


1983년 덩샤오핑은 마침내 중국 최고 지도자로 올라섰다.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 /사진=머니투데이
중국 최고 권력에 오른 덩샤오핑은 가장 먼저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없앴다. 덩샤오핑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며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 덩샤오핑은 농업과 공업, 국방, 과학기술 등 4가지 주요 분야에서 근대화 정책을 펼쳐 경제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마오쩌둥과의 관계는 분명 우호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기조로 국가를 운영했다. 민족주의를 우선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덩샤오핑이 말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뜻의 흑묘백묘론은 그의 실용주의적 정책 기조를 드러내는 말로 유명해졌다. 덩샤오핑은 이를 바탕으로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부터 30여년간 중국 경제는 연평균 9.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서방과의 우호적 관계로도 이어졌다. 1979년 덩샤오핑은 미국 백악관을 방문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의 개방적인 국가 운영에 지미 카터 대통령은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던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인했다.

개혁개방으로 중국을 부흥시킨 덩샤오핑이지만 지울 수 없는 오점도 남았다. 바로 천안문 사태다. 그는 당시 총리였던 리펑에게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라며 강경진압을 지시했다.

1989년 6월4일. 민주화를 향한 민심이 들끓던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이 피로 물들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는 중국 대륙에 민주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대외 전략을 나타내는 고사성어 '도광양회'는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덩샤오핑이 남긴 뜻과 다르게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자신이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강대강 전략을 펼치고 있다. 시 주석은 이제 그때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copyright © 2024 powered by 영혼의섬닷오알지   sitemap